'광주의 영원한 별', 윤상원과 들불 7열사 [오월길 이야기]
본문전국호남'광주의 영원한 별', 윤상원과 들불 7열사 [오월길 이야기]수정 2026-07-24 13:59펼침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구글 선호 매체 등록⑨ 열정 코스 : 들불야학 옛터광천동 성당의 들불야학 옛터. 당시 건물의 입구 쪽 벽체가 보존돼 있다.
!['광주의 영원한 별', 윤상원과 들불 7열사 [오월길 이야기]](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300/180/imgdb/child/2026/0724/53_17848691511115_20260723504065.webp)
본문전국호남'광주의 영원한 별', 윤상원과 들불 7열사 [오월길 이야기]수정 2026-07-24 13:59펼침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구글 선호 매체 등록⑨ 열정 코스 : 들불야학 옛터광천동 성당의 들불야학 옛터. 당시 건물의 입구 쪽 벽체가 보존돼 있다.
광고오월길은 1980년 5월 광주항쟁의 흔적을 따라 걷는 66.2㎞의 길이다. 횃불, 희생, 광장, 열정, 영혼, 그리고 최근 추가된 ‘한강 작가 소년의 길’까지 6개 코스다.
길을 따라 주요 현장에 사적비를 세워 친절히 안내하고 있다. 광주광역시가 만든 스마트투어 앱 ‘5·18 민주화운동’을 따라 걸으면 편리하다. 5·18기념재단 홈페이지에도 오월길 안내 코너가 따로 있다.
광주에서 태어나 고교 시절 광주를 겪은 백기철 전 한겨레 기자가 오월길 이야기를 10여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오월길 열정 코스는 5.9㎞의 짧은 구간이다.
시작점인 5·18기념공원과 종착점인 전남대 민주길은 다른 코스에도 속해 있어서 이미 한번씩 찾은 곳이다. 코스도 단출해서 중간의 두 곳, 들불야학 옛터와 무등경기장 정문 사적지만 둘러보면 된다. 들불야학은 윤상원 열사의 청춘이 서린 곳이고, 무등경기장은 5·18민중항쟁의 기폭제가 됐던 택시 기사들의 차량 시위가 시작된 곳이다.
들불야학 옛터는 광천동 성당 내에 있다. 일대가 재개발 중이어서 집들이 모두 소개됐다. 텅 빈 동네 한가운데 성당만 덩그러니 남아 있어 다소 을씨년스러웠다.
동네는 비었지만 성당은 당분간 사목활동을 계속한다고 한다. 들불야학은 1978년 이 성당 교리실을 빌려 개교했다. 교리실은 지금은 철거됐고 당시 건물 입구 쪽 벽체만 남겨져 있다.
성당 마당 들머리의 가장 눈에 띄는 곳에 벽체가 정성스레 보존돼 있다. 붉은 벽돌로 된 벽면 상단의 ‘대건안드레아교육관’이라는 현판이 그 시절의 기억을 소환한다.윤상원이 들불야학 교사로 합류한 때는 1978년 10월이었다.
그의 나이 28살 때다. 이후 1980년 5월27일 새벽 도청에서 산화하기까지 1년7개월여 동안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은 늦되고 번민하고 순수했기에 더욱 빛이 났다.
윤상원은 화려한 이력을 가진 운동권이 아니었다. 대학은 삼수 끝에 전남대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갔다.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교관이 되는 게 꿈이었다.
군대를 다녀온 뒤 맏이로서 부모님 소원을 들어드리고자 서울 주택은행에 취직해 잠시 직장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의 순수함과 고뇌는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못했다. 은행을 몇 개월 만에 그만두고 광주로 내려와 노동현장에 투신하는 일방, 들불야학 교사로 활동했다.
윤상원은 신군부가 5·17 비상계엄 확대 조처 때 실시한 예비검속 대상이 아니었다. 내로라하는 운동권 인사들이 예비검속으로 잡혀들어갈 때 윤상원은 녹두서점을 지켰고, 금남로를 지켰고, 도청을 지켰고, 그리고 광주를, 급기야 1980년 5월 비탄에 빠진 대한민국을 온몸으로 껴안고 스러져 갔다.광고“불초 소생 부모님의 뜻을 저버리고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저를 길러주시고 뒷바라지해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평생을 다 바쳐 노력해도 부족합니다마는, 부정과 불의가 판을 치는 이 나라 이 민족의 현실을 무시할 수 없어 그만두려 하니 부모님 양해해주십시오.”윤상원이 주택은행 봉천동지점을 6개월 만에 사직하면서 아버지께 보내려고 쓴 편지 일부다. 윤상원은 차마 이 편지를 부치지 못하고 오래도록 간직하고 다녔다.
광고광고윤상원은 순수하고 섬세한 사람이었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인 1960년부터 1979년 4월까지 19년 동안 써온 11권의 소박한 일기장은 그의 이런 면모를 잘 보여준다.“모처럼 행원들끼리 한 자리.
야, 내가 주산 말고 못 한 게 뭐냐. 진탕지게 술. 노래를 막 불렀더니 조금 시원”(1978년 2월16일)/“모두들 말리는 일이었다.
세상살이가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인가. 뚜렷한 대책 없이 그냥 그만둔다는 일은 무모하고 경솔한 일이 될 것이란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너무나 분명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산다는 것은 결국 무엇 때문일까?”(7월10일)/“아고매? 피곤허다.
정말로 피곤해 미치겠다. 난생 처음 공장노동을 시작해 보는 날이었다. 공장장 인도를 받아 절단부로 배치되었다”(10월25일)/“밤늦게 기순과 함께 송산교에 야학 강학들의 모임에 가보았다.
밤늦게까지 토론하고 장래 계획을 세우고 문제점을 검토하는 그 강학들의 모습을 보고 광천동 야학의 밝은 미래를 점칠 수 있다고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밤늦게까지 얘기하다 모두들 시골 방에 누워 새우잠을 잤다”(10월28일)/“나이 30이 되는 설을 찾아가는 나는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마저 이 시대의 아픔으로 돌려버리기엔 내 자신 너무 가정에 소홀한 것이 아닌가?”
(1979년 1월27일)/“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이 겨울 속에 핀 개나리 버들가지에도”(4월7일).광고윤상원은 1978년 가을 광주 광천공단의 위장 취업자가 됐다.
한남플라스틱에 고졸 경력으로 취업했다. 광천동 시민아파트 방 한 칸을 얻어 들불야학 학생 한 명과 함께 살았다. 시민아파트 주민 대다수는 노동으로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는 극빈층이었다.
윤상원의 방은 들불야학의 또 다른 교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공장 노동자의 턱없이 부족한 수입으로 이를 감당하기 어렵자 주변 도움으로 양동신협에 취직해 들불야학 공동체 살림을 꾸렸다. 임낙평은 ‘윤상원 평전’에서 “미래가 보장된 직장을 과감히 포기했고, 노동자를 자청했으며, 소외되고 억압받는 민중과 함께 살았다.
자신의 자취방과 수입과 의식과 시간을 공동체를 위해 내놓았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쉼 없이 자신을 절차탁마했다. 이런 과정이 있었기에 5월에 자신을 던졌고, 그리고 죽을 줄 알면서도 과감히 몸을 던졌다”고 썼다.
들불야학 시절 윤상원이 살았던 광천동 시민아파트. 현재 이 일대는 모두 재개발을 위해 비워져 있다.들불야학에는 박기순이 있었다.
들불야학은 애초 서울에서 야학 교사를 했던 광주 출신 대학생들이 제안해서 1978년 7월 청소년 노동자 35명과 교사 8명으로 출발했다. 박기순은 1978년 6월 전남대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으로 무기정학을 당한 뒤 1기 교사로 합류했다. 들불이라는 이름은 박기순이 직접 지었다.
10월부터는 광천공단 내 동신강건에서 견습공으로 일했다. 그해 12월25일 성탄절 저녁 박기순은 학생들과 뒷산에서 야학당 땔감으로 쓸 장작을 모으고 밤늦게 귀가해 자다 연탄가스에 중독돼 세상을 떴다. 그의 나이 스물둘이었다.
장례식에서는 마침 광주에 온 김민기가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이 되어’를 영결가로 바치자 식장이 온통 눈물바다가 됐다. 12월27일 윤상원의 일기에는 박기순을 애틋하게 추모하는 시가 적혀 있다.“불꽃처럼 살다간 누이여/왜 말없이 눈을 감고만 있는가/두 볼에 흐르던 장밋빛/늘 서럽도록 아름다웠지/그대의 죽음은 내게 무엇을 말하는가/아무리 쳐다보아도 넌 아직 살아 있을 뿐이다…”
잘 알려진 대로 윤상원과 박기순은 광주항쟁 두 돌을 앞둔 1982년 2월 영혼결혼식을 올렸다. ‘노동자의 영원한 누이’ 박기순의 혼령과 ‘오월 광주의 영원한 대변인’ 윤상원의 혼령이 주변 선후배들의 주선으로 만나 결혼한 것이다. 망월동 묘역에서 문병란 시인 주례로 진행된 영혼결혼식에서 윤상원의 어머니가 아들 무덤을 끌어안고 통곡하자 참석자들은 눈시울을 적셨다.
영혼결혼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황석영 작가와 몇몇 후배들은 ‘넋풀이:빛의 결혼식’이라는 노래굿을 만들었는데, 김종률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해 집어넣었다. 이후 이 노래는 전국으로 퍼졌고, 5·18을 상징하는 노래가 됐다.광고윤상원은 오월항쟁 직전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 중앙위원이자 민주통일국민연합(국민연합) 사무국장이었다.
윤상원은 1978년 서울에 있을 때 이태복과 만나 노동운동에 헌신할 뜻을 밝혔고, 이후 광주 무등산 등지에서 둘이 만나 노학연대를 중심으로 한 투쟁노선을 다졌다. 광주항쟁 직전인 1980년 5월1일 이태복 주도로 인천에서 결성된 전민노련 중앙위원회 결성식에서 윤상원은 광주전남 담당 중앙위원이 됐다. 이태복은 윤상원이 학생운동 경력은 풍부하지 않았지만 믿음직한 동지로 여겼다고 훗날 술회했다.
윤상원은 또 재야 청년 운동권 윤한봉의 부탁을 받고 이태복의 양해를 얻어 국민연합 광주전남지부 사무국장도 맡았다. 광주항쟁 초기 윤상원은 이태복과 전화로 긴밀히 연락하며 행동 방향을 논의했다. 5월20일 오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 가두시위를 벌이기로 한 국민연합 지침에 따라 윤상원 등은 한일은행 앞에서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김상집은 ‘윤상원 평전’에서 “윤상원은 항쟁 기간 국민연합 사무국장으로서의 역할과 전민노련 중앙위원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고립무원의 광주에 극히 적은 동지들과 함께 남아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고 적었다. 윤상원이 항쟁 시기 단순히 개인 차원을 넘어 전국 단위 조직의 핵심으로 연결돼 있었다는 얘기다.윤상원은 5월18일 아침 전남대 정문에 있었다.
광주항쟁의 시발점이자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시원이 된 전남대 정문 시위 현장에 그가 있었다. 그날 아침 광천동 집으로 찾아온 박관현 전남대 총학생회장에게 당분간 피해 있을 것을 권한 뒤 윤상원은 곧장 전남대 정문으로 갔다.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으로 흩어진 학생들이 시내로 이동하는 과정을 함께 했다.
대열이 신역, 지금의 광주역에 이르렀을 때 윤상원은 녹두서점으로 전화를 걸어 김상집에게 상황을 알렸다. 5월21일 저녁 윤상원은 무장한 시민군들과 함께 학동 쪽에서 출발해 도청으로 향했다. 계엄군은 이미 퇴각했고 도청 안 화단에는 시신들이 즐비했다.
윤상원은 주변 시민군 중에 아는 사람이 없어 도청에 잠시 머문 뒤 빠져나왔다. 이후 녹두서점, 들불야학 동료들과 ‘투사회보’를 배포하고 가두방송을 하고 도청 앞 분수대 집회를 조직하는 등 도청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윤상원은 항쟁의 방향을 바로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시 도청에서는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총기를 회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매우 강했다. 하지만 윤상원 등은 시민군 무장이 해제되면 계엄군이 또다시 피의 살육을 벌일 것이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억울하게 숨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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