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테러 살아남고 재판 기사회생…‘극우 불사조’ 르펜은 누구
본문국제유럽폭탄테러 살아남고 재판 기사회생…‘극우 불사조’ 르펜은 누구천호성기자수정 2026-07-28 05:00펼침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구글 선호 매체 등록마린 르펜 프랑스 국민연합(RN) 하원의원이 21일 의회에 출석해 의원들의 토론을 듣고 있다.

본문국제유럽폭탄테러 살아남고 재판 기사회생…‘극우 불사조’ 르펜은 누구천호성기자수정 2026-07-28 05:00펼침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구글 선호 매체 등록마린 르펜 프랑스 국민연합(RN) 하원의원이 21일 의회에 출석해 의원들의 토론을 듣고 있다.
EPA 연합뉴스 광고#1976년 11월2일 새벽, 프랑스 파리 15구 한 아파트 5층에서 여덟살 난 소녀가 귀청을 찢는 폭음에 잠에서 깼다. 다이너마이트 20㎏이 터져 아파트 벽과 계단이 날아갔다. 아이는 연기로 앞도 분간할 수 없는 방에 웅크려 두 언니와 몸을 떨다가 구조됐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죽음을 속이는 아가씨”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50년이 지난 2026년 7월7일, 중년 정치인이 된 소녀는 정치 인생을 건 재판에서 다시 한번 목숨을 건진다. 유럽의회 자금 430만유로(75억원)를 빼돌린 혐의로 선 항소심 법정에서 1심보다 약한 형을 받아, 내년 프랑스 4월 대선에 출마할 자격을 지킨 것이다.
그는 곧장 내년 4월 열리는 대선 캠페인 누리집을 열었다. 첫 포스터에서 그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처럼 순백의 옷을 입고 양팔을 벌린 모습이다. 포스터의 구호는 “르네상스”, 즉 부활이었다.
프랑스 극우 정당 국민연합(RN) 대선후보 마린 르펜(58)의 이야기다. 그는 최근 여론조사에서 40% 가까운 지지율을 올리며 가장 유력한 차기 프랑스 대통령으로 떠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극우 정권이 들어설지 유럽 정가의 관심이 쏠린다.
광고7일 유럽의회 공금횡령 사건 항소심 판결로 내년 대선 출마 자격을 회복한 마린 르펜 프랑스 국민연합(RN) 하원의원이 같은 날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공개한 포스터. 십자가의 예수를 연상시키려는 듯 양팔을 벌린 채 웃고 있다. “프랑스를 위해.
부활”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르펜 엑스(X) 갈무리 극우의 불사조 프랑스 언론이 르펜을 묘사할 때 자주 쓰는 말은 ‘불사조’다. 1968년 파리 근교 뇌이쉬르센에서 프랑스의 거물 극우 정치인 장마리 르펜의 막내딸로 태어나 대선에 4번 도전하기까지 숱한 ‘죽을 위기’를 넘겼기 때문이다.
광고광고 르펜은 2006년 펴낸 자서전 ‘흐름을 거슬러’의 첫장을 여덟살 때 겪은 폭탄 테러의 기억으로 시작했다. 이 공격은 당시 신생 극우 정당 국민전선(FN) 대표였던 아버지 장마리 르펜을 겨냥한 것으로 추정됐으나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르펜은 자신이 이 경험으로 “단숨에 정치의 세계로 들어섰다.
그것도 정치의 가장 폭력적이고 잔인하며 야만적인 얼굴을 통해서였다”고 회상한다. 아버지의 정적들이 노리는 공격이 자신과 가족의 목숨까지 앗아갈 수 있으며, 좋든 싫든 자신도 아버지와 같은 운명을 짊어졌음을 직감했다는 것이다. 언론은 르펜 부녀가 자신들의 정치적 이력에서 이런 ‘부활’ 체험을 강조하는 데 주목한다.
십자가에 못박힌 뒤 부활한 예수처럼 자신들이 주류 정치권의 박해를 이겨내고 승리한다는 서사를 짠다는 얘기다. 리베라시옹은 7일 기사에서 “온 세상은 죽을 수 있지만, 그들은 죽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어떤 사명을 위해 선택받았다는 증거로 쓰인다”며 “마치 그가 본의 아니게, 어쩔 수 없이, 심지어 ‘희생적’ 소명 때문에 의무감으로 정치에 들어온 것처럼 말이다”라고 꼬집었다.
광고 르펜은 18살이던 1986년 국민전선에 입당했다. 이후 법학을 전공해 1992년 변호사 자격을 땄고, 1998년 국민전선 초대 법무팀장이 됐다. 국민전선은 그의 아버지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리멸렬하던 프랑스 극우 세력을 모아 1972년 창당한 정당이었다.
르몽드에 따르면, 아버지 르펜은 이전까지 사회에서 “왕따 정파”였던 “반유대주의자, 정체성주의자, 초보수주의자, 네오파시스트들”을 규합하며 “공화국의 악마”로 불렸다. 1998년 당내 2인자였던 브뤼노 메그레와 언니 마리카롤린 르펜이 절반 넘는 당직자를 이끌고 분당하자, 르펜은 이를 실력을 증명할 기회로 삼는다. 그는 당사와 당명 사용권을 둘러싸고 분당파와 벌인 소송에서 이겼다.
이를 기반으로 국민전선은 이듬해 유럽의회 선거에서 5명의 당선자를 낸 원내 정당으로 남았다. 르펜이 언니와 측근들까지 용서 없이 제명·징계하자 극우 인사들은 르펜을 “홍위병”이라고 하며 무서워했다. 그사이 르펜은 1998년 북부 노르파드칼레 지역의원에 당선돼 첫 선출직을 얻었다.
이후 2004년 유럽의회 의원을 거쳐 2011년 국민전선 당대표에 올랐다. 아버지가 명예 당대표로 물러나면서 르펜은 2012, 2017, 2022년 대선에서 내리 극우 정당 후보로 대선에 나갔다. 지난해 3월 공금횡령 혐의로 피선거권 5년 박탈형 등을 받으며 위기에 몰렸지만, 최근 항소심에서 피선거권 박탈 기간이 줄며 대선 출마 길을 열었다.
광고프랑스 극우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 대선후보(왼쪽)와 조르당 바르델라 대표가 르펜의 대선 출마 선언 이튿날인 8일 프랑스 북서부 라플레슈에서 첫 유세에 나섰다. 르펜 엑스(X) 갈무리 “좌파도 우파도 아닌” 르펜의 정치 노선은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로 요약된다. 그는 2016년 2월 국민전선 세미나에서 우파 공화당 탈당파 출신들을 향해 “나는 여러분이 몸담았던 우파를 잘 모른다”고 말한 바 있다.
좌파는 물론 기존 우파 정당도 ‘기득권’으로 선 그으며, 자신은 이른바 ‘국민우선주의’를 펴겠다는 것이다. 부친 장마리 역시 2002년 대선 과정에서 자신의 입장을 “사회적으로는 좌파, 경제적으로 우파, 국가적으로는 프랑스”라고 요약했는데 르펜은 이를 이어받는다. 르펜의 구상에서 국가는 긴축 없는 재정 집행과 서비스로 국민의 필요를 충족시킨다.
수도·전기 등 공공요금은 낮추고 소상공인 세 부담을 줄여 서민들의 가용 소득을 높인다. 공적 연금의 재정 건전화를 위해 법정 정년을 늦추고 보험료 납입 기간을 늘리는 식의 연금 개혁에는 반대한다. 작은 정부와 시장 자유를 주장하는 기존 우파와는 다른 주장이다.
폴리티코 유럽판은 르펜이 지난 4월 베르나르 아르노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 회장 등이 모인 재계 만찬에서도 “교조적 태도”로 “국가 주도·개입주의 담론”을 펼쳤다고 보도했다. 르펜 공약의 또다른 축은 이민자 규제와 치안 통제 강화다. 그는 프랑스에서 급증하는 총기 사고·마약 유통의 책임을 마크롱 정부의 관대한 이민 정책 탓으로 돌린다.
이민자 지원으로 나라 곳간이 빈다며 국가 제공 서비스의 대상은 ‘프랑스 태생’으로 한정하자고 한다. 르펜은 내년 대선 출마를 선언한 직후인 8일 소셜미디어 엑스(X)에 “우리 선거운동의 의의는 프랑스의 부흥에 있다”며 “학교와 사법제도, 국민의 안전, 국경 통제, 그리고 주권의 부흥을 시작할 것”이라고 썼다. 특히 르펜은 옛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 등 북아프리카 출신 무슬림 이민자를 향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26일 엑스에 “이슬람주의는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그 지배에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전체주의 이념”이라고 못박았다. 그러면서도 르펜은 아버지가 남긴 사상적 유산 중 집권에 걸림돌이 될 만한 반사회적인 노선은 제거하려 애써왔다. 당원들의 공개적인 유대인 혐오, 여성 혐오, 나치 추종 발언 등을 금지하며 ‘탈악마화’를 시도한 것이다.
2015년 87살의 아버지가 반유대주의 성향 매체 ‘리바롤’ 인터뷰에서 “(나치) 가스실은 전쟁의 한 세부사항이었을 뿐”, “북유럽과 백인 세계를 구하려면 러시아와 반드시 협력해야 한다” 등의 주장을 쏟아내자, 르펜은 아버지를 당에서 제명했다. 2018년에는 당명을 국민전선에서 국민연합으로 바꿨다. 아버지 르펜은 2025년 사망할 때까지 이 일이 정치적인 “친부 살해”라고 반발했다.
2017년 5월 열린 대선 결선 토론회에서 마린 르펜 당시 국민전선 후보(왼쪽)과 에마뉘엘 마크롱 앙마르슈(오른쪽) 후보가 논쟁하고 있다. 마크롱이 유로존 탈퇴, 재정·복지 정책 등을 두고 르펜을 몰아붙이며 이 토론은 르펜 정치사의 ‘흑역사’가 됐다. 그는 2024년 리베라시옹 인터뷰에서 이 토론이 “고통스러웠다”고 돌아봤다.
엘세이(LCI) 방송 유튜브 갈무리 ‘공화국 방파제’ 작동할까 르펜은 9일 르피가로가 이에프오페(Ifop)에 의뢰한 대선 여론조사에서 36% 지지율로 2위 에두아르 필리프 전 총리(19%)를 여유 있게 앞섰다. 다만 대선까지 남은 9개월 동안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그는 최근 항소심 판결 뒤에야 대선 레이스에 합류해 공약 마련이 늦었다.
향후 정책 구체화 과정에서 경제 노선 등을 두고 갈등이 불거질 수 있다.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연구원인 펠리시앵 포리는 한겨레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국민연합 내부에서는 두 노선이 충돌하고 있다. 2인자인 조르당 바르델라(국민연합 대표)는 더 자유주의적이고 기업 친화적인 정책을 강조해왔다”고 말했다.
또 상위 득표자 둘이 맞붙는 대선 결선에서는 르펜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극우 집권만은 안된다’고 생각하는 유권자들이 좌우를 막론하고 상대 후보에 표를 몰아주는 이른바 ‘공화국 방파제’ 현상이 나타날 수 있어서다. 포리 연구원은 “르펜이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러나 이후의 결과는 그가 누구와 맞붙을지, 특히 중도우파 유권자들이 어떻게 행동할지에 달려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프랑스 우파 유권자들이 급진화 하고 있어, 이들은 좌파 후보가 결선에 오르면 국민연합에 투표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여론조사 결과로 대선을 예단하기는 너무 이르다는 지적도 나온다.
르몽드는 1995∼2022년 여섯번의 대선 동안 선거 1년 전 여론조사에서 1위였던 후보가 실제로 대통령이 된 적은 절반 뿐이었다고 짚었다. 마크롱 대통령도 17일 기자회견에서 2017년 자신이 승리한 대선을 상기시키며 “여론조사는 경계해야 한다. 2016년 7월엔 (여론조사로) 이미 당선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겨졌던 이들이 많았지만 2017년 5월에 실제로 당선된 사람은 그들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르펜의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은 채 “프랑스 국민을 믿으라. 국민에게 최악만을 예언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천호성 기자 rieux@h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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